서론: 시한폭탄이 된 팔레스타인 땅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지배권은 국제연합(LN)에 의해 공식적으로 영국에 넘어갔습니다. 이를 '영국 위임통치령(British Mandate for Palestine)' 시대라고 부릅니다.

영국은 이제 자신들이 뿌려놓은 이중 계약의 청구서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한쪽에서는 "독립 아랍 국가를 세워달라"고 요구했고, 다른 쪽에서는 "유대인 민족 고향을 건설하게 해달라"고 압박했습니다. 두 민족의 동상이몽 속에서,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의 팔레스타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화약고로 변해갔습니다. 두 민족의 갈등이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유혈 충돌로 번졌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 유대인 이주 급증과 아랍인의 생존권 위기

영국의 통치 아래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특히 1930년대 들어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정권이 들어서고 유럽 전역에 극심한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자, 생존을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밀려드는 유대인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 인구 비율의 급변: 1922년 전체 인구의 약 11%에 불과했던 유대인은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약 30%까지 늘어났습니다.

  • 토지 및 경제적 갈등: 유대인 자본가들은 해외 펀드를 조성해 아랍인 부재지주(땅에 살지 않는 지주)들로부터 막대한 토지를 사들였습니다. 땅을 소유하게 된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일하던 아랍인 소작농들을 내보내고 오직 유대인 노동자만을 고용하는 '유대인 노동(Jewish Labor)'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수백 년간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던 팔레스타인 아랍 농민들은 하루아침에 직장과 삶의 터전을 잃고 부랑자로 전락했습니다. 아랍인들에게 유대인의 유입은 단순한 이웃의 증가가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권을 통째로 흔드는 '침략'으로 다가왔습니다.

2. 통곡의 벽 사건(1929년): 종교적 갈등의 폭발

경제적, 사회적 불만이 쌓여가던 중, 결국 종교적 성지 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첫 대규모 유혈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929년의 '통곡의 벽 사태(1929 Palestine Riots)'입니다.

예루살렘에 위치한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에게는 고대 성전의 유일한 잔해로서 가장 신성한 기도처이지만, 무슬림들에게는 무함마드가 말을 매어두었던 성스러운 성벽(알 부라크)이었습니다. 1928년 말, 유대인들이 기도 편의를 위해 통곡의 벽 앞에 스크린(분리 칸막이)을 설치하자 아랍인들은 이를 "유대인들이 이슬람 성지를 잠식하려는 음모"라며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이 작은 다툼은 1929년 8월, 양측의 대규모 폭력 사태로 번졌습니다. 아랍인들의 유대인 커뮤니티 습격과 이에 맞선 유대인 자위대의 충돌로 인해 일주일 만에 유대인 130여 명, 아랍인 110여 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두 민족이 더 이상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없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3. 아랍 대봉기(1936~1939년)와 영국의 갈지자 행보

1936년, 참다못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영국 위임통치 정부와 유대인 이주에 맞서 대대적인 저항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아랍 대봉기(The Great Arab Revolt)'라고 부릅니다. 아랍인들은 총파업, 납세 거부, 그리고 게릴라 전술을 통해 영국의 식민 통치에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영국은 군대를 동원해 이 봉기를 가혹하게 진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랍인 지도층이 대거 체포되거나 추방당하면서, 훗날 팔레스타인 사회가 자치 능력을 상실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봉기 진압 후 아랍 여론의 악화를 두려워한 영국은 1939년 '백서(White Paper)'라는 새로운 정책을 발표합니다.

  • 유대인의 이주 숫자를 향후 5년간 연간 1만 5천 명으로 제한한다.

  • 유대인의 토지 매입을 엄격히 제한한다.

  • 10년 이내에 아랍인과 유대인이 공동 통치하는 독립 국가를 세운다.

결론: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영국의 철수

영국의 1939년 백서는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양쪽 모두를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 아랍인들은 유대인의 이주가 즉각 전면 중단되지 않고, 독립이 10년 뒤로 미뤄진 것에 실망했습니다.

  •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이 자행되던 가장 절박한 시기에 탈출구를 막아버린 영국을 '배신자'로 규정했습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이르군(Irgun)', '레히(Lehi)' 같은 극렬 무장 지하조직을 결성해 오히려 영국군을 상대로 폭탄 테러를 감행하며 격렬히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영국의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은 아랍인의 게릴라 공격과 유대인의 대영 테러가 동시에 몰아치는 통제 불능의 무법지대가 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재정이 파탄 난 영국은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이 문제를 새로 창설된 국제기구인 UN(국제연합)으로 넘겨버린 채 무책임한 철수를 준비하게 됩니다.

다음 5편에서는 영국이 떠난 자리에 던져진 '1947년 UN 분할안과 이스라엘의 건국 선언'이 어떻게 현대 중동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