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백악관 잔디밭에서 울려 퍼진 평화의 찬가

1993년 9월 13일, 미국 백악관 잔디밭에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역사적인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평생을 서로를 말살해야 할 원수로 여기며 싸워온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총리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의장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 아래 마주 서서 역사적인 악수를 나눈 것입니다.

이 악수는 양측이 수개월 동안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비밀리에 협상해 이뤄낸 ‘오슬로 협정(Oslo Accords)’의 공식 체결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마침내 피비린내 나는 중동 분쟁이 종식되고 평화의 시대가 열리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악수 뒤에는 갈등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시한폭탄과 같은 독소 조항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1. 오슬로 협정의 핵심: '영토와 평화의 교환'

오슬로 협정의 근본적인 원칙은 간단했습니다.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땅과 자치권을 내어주고,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에게 평화와 안보를 보장한다는 '영토와 평화의 교환(Land for Peace)'이었습니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은 단계적 자치안이었습니다.

  • 상호 승인: 이스라엘은 PLO를 팔레스타인 민족의 유일한 합법 대변자로 인정하고, PLO는 이스라엘의 국가 생존권을 공식 인정하며 테러 포기를 선언했습니다.

  • 가자-제리코 선행 자치: 이스라엘 군이 점령지인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도시 '제리코'에서 먼저 철수하고, 이곳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를 수립하여 행정권과 치안권을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 5년의 임시 기간: 우선 5년 동안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제한된 자치권을 준 뒤, 가장 민감하고 복잡한 최종 쟁점들은 5년 후에 다시 협상하여 마무리 짓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공로로 라빈 총리와 아라파트 의장, 그리고 협정을 막후에서 주도한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199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2. 평화의 싹을 잘라버린 극단주의자들의 총성

하지만 평화의 열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양측 사회 내부에서 "원수와 손을 잡았다"며 협정에 격렬히 반대하는 강경파와 극단주의자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 팔레스타인 강경파(하마스)의 폭탄 테러: 이슬람 저항 운동 단체인 하마스(Hamas)는 오슬로 협정을 '팔레스타인 땅을 이스라엘에 통째로 넘겨준 배신 행위'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들은 협정을 무산시키기 위해 이스라엘 민간인을 겨냥한 자살폭탄 테러를 연이어 감행하며 평화 기류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 이스라엘 강경파의 반발과 라빈 암살 사태: 이스라엘 우익 세력 역시 조상의 땅을 아랍인에게 내어주는 라빈 총리를 '매국노'라 부르며 격렬한 반대 시위를 벌였습니다. 결국 1995년 11월 4일, 텔아비브에서 열린 평화 지지 집회에 참석했던 라빈 총리가 시오니즘 극우파 유대인 청년인 이갈 아미르의 총탄에 맞아 서거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평화의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었던 라빈 총리의 암살은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의 척추를 부러뜨린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정권은 협정에 회의적인 우파 세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3. 오슬로 협정이 품고 있던 치명적인 한계

많은 역사학자는 오슬로 협정이 애초에 핵심적인 난제들을 뒤로 미루어 놓은 '시한부 협정'이었다고 지적합니다. 5년 뒤에 논의하기로 했던 최종 지위 협상(Final Status Issues)의 주제들은 양측이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이었습니다.

  1. 예루살렘의 지위: 양측 모두 예루살렘을 자신들의 영원한 수도라고 주장했습니다.

  2. 유대인 정착촌 문제: 협정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이스라엘은 서안지구 내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중단하지 않고 오히려 확장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영토가 난도질당하는 모습을 보며 협정의 진정성을 의심했습니다.

  3. 난민의 귀환권: 1948년 전쟁 당시 쫓겨난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고향 귀환 문제를 두고 이스라엘은 인구학적 붕괴를 우려해 절대 불가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결론: 평화의 문턱에서 다시 늪으로

2000년 7월,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말에 아라파트 의장과 이스라엘의 에후드 바락 총리를 캠프 데이비드로 다시 불러 모아 이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최종 담판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지의 관할권과 난민 귀환권을 둘러싼 간극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고, 협상은 최종 결렬되었습니다.

오슬로 협정은 평화라는 위대한 이상을 품었지만, 역설적으로 평화 협정이 진행되는 7년 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은 더 나빠졌고 유대인 정착촌은 배로 늘어났습니다. 대화와 타협으로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기대는 거대한 배신감과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평화의 기회가 완전히 무산되자, 참아왔던 분노는 다시 한번 폭발하게 됩니다. 다음 12편에서는 오슬로 협정의 파탄이 불러온 피비린내 나는 대폭발, '제2차 인티파다와 이스라엘의 거대한 분리장벽 건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