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2천 년의 방랑과 그리움의 역사
1편에서 다루었듯, 기원후 135년 로마 제국에 의해 고향 땅에서 강제로 쫓겨난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이를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등 문화와 언어가 전혀 다른 낯선 땅에 정착해야 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나라를 잃고 2,00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 문화, 그리고 언어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매년 유대인들의 유월절 축제 때마다 이들은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만나자"라는 인사를 나누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꿈꿨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 이 막연한 종교적 그리움은 '시오니즘(Zionism)'이라는 구체적인 정치적 민족주의 운동으로 전환됩니다. 방랑하던 유대인들이 왜 갑자기 고향 땅으로 돌아가 국가를 세우겠다고 결심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1.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의 심화와 생존의 위협
유대인들이 유럽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국가 건설을 꿈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유럽인들의 극심한 박해였습니다. 유럽의 기독교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오랜 세월 차별해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기에 주로 금융업이나 상업에 종사했는데, 이는 오히려 '돈만 아는 탐욕스러운 집단'이라는 편견을 낳았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차별은 단순한 사회적 무시를 넘어 생존을 위협하는 폭력으로 발전했습니다.
포그롬(Pogrom): 러시아 제국과 동유럽에서는 유대인을 겨냥한 대규모 유혈 약탈과 학살 사건인 '포그롬'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1894년):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상지라 불리던 프랑스에서조차 유대인 출신의 군관 포 드레퓌스가 간첩 누명을 쓰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회 전체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마녀사냥 하는 모습을 보며, 유대인 지식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럽 사회가 아무리 근대화되고 발전하더라도, 자신들은 결코 유럽의 온전한 시민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2. 테오도르 헤르첼과 시오니즘(Zionism)의 탄생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사건을 직접 취재하며 유대인 혐오의 끔찍함을 목격한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기자 테오도르 헤르첼(Theodor Herzl)은 중대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유대인이 박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주권을 가진 우리만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뿐이다."
헤르첼은 1896년 《유대인 국가(Der Judenstaat)》라는 책을 발간하며 국가 건설의 정당성을 알렸고,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회 세계 시오니즘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여기서 '시오니즘'이라는 공식 운동이 출범합니다. 시오니즘이란 성경에서 예루살렘을 뜻하는 '시온(Zion)'의 언덕으로 돌아가자는 뜻으로, 유대인의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주의 운동을 의미합니다.
초기 시오니즘 운동 내에서는 당장 생존이 급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우간다나 남미의 아르헨티나에 유대인 자치령을 만들자는 현실적인 대안도 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유대인은 종교적, 역사적 뿌리가 깊은 오스만 제국 지배하의 '팔레스타인' 땅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반대했고, 결국 목표는 팔레스타인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3. 제1~2차 알리야(Aliyah):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 시작
시오니즘 운동의 본격화와 함께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 행렬이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이 이주 과정을 히브리어로 '알리야(Aliyah, 올라감)'라고 불렀습니다.
제1차 알리야 (1881~1903): 동유럽의 포그롬을 피해 약 2만 5천 명에서 3만 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들은 유럽의 유대인 자산가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아랍인 지주들로부터 황무지와 늪지대를 돈을 주고 사들여 농경지로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알리야 (1904~1914): 러시아 혁명 실패 이후 더 많은 젊은 유대인 지식인들이 이주했습니다. 이 시기에 유대인 특유의 집단 농장 체제인 '키부츠(Kibbutz)'가 만들어졌고, 오늘날 이스라엘의 대도시인 '텔아비브'의 기반이 닦였습니다.
이로 인해 1880년대까지만 해도 전체 인구의 5% 미만(약 2만 명)에 불과했던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인구는 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약 8만 명 이상으로 급증하게 됩니다.
결론: 두 민족의 피할 수 없는 충돌의 서막
유럽 유대인들에게 시오니즘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해방 운동이자 오랜 염원의 실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귀향의 이면에는 커다란 비극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텅 빈 황무지'라고 생각했던 그 땅에는 이미 수백 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지에서 돈과 조직력을 앞세운 유대인들이 밀려와 땅을 사고 자신들만의 자치 커뮤니티를 구축하자, 원주민이었던 아랍인들은 점차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 땅을 둘러싼 두 민족의 조용한 갈등은, 다음 편에서 다룰 '1차 세계대전과 영국의 이중 계약'을 만나면서 폭발적인 국제 분쟁으로 번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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